꿈과 절망의 82km: 파나마 운하 건설, 인류가 치른 대가
16세기부터 꿈꿔온 파나마 운하 건설은 프랑스의 실패, 미국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수만 명이 생명을 잃은 대가로 탄생한 이 인프라는 세계 무역의 역사를 뒤바꿨다.
꿈과 절망의 82km, 파나마 운하 건설기
불가능하다는 답변으로 시작된 꿈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 바스코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처음 통과했을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좁은 땅을 관통하는 운하가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말이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5세도 같은 생각을 했다. 16세기 초 스페인 탐험가 바스코 발보아는 1513년 최초로 파나마 지협을 통과하는 연결 항로에 대한 구상을 했으며, 1534년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통치 시절 카를로스 5세는 파나마 지역 총독에게 강을 따라 태평양으로 가는 뱃길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파나마로부터의 답변은 누구라도 그러한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꿈은 300년을 기다렸다.
프랑스의 야심과 좌절
파나마 운하 건설을 착안한 것은 16세기 초의 일이었으나,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1880년 프랑스인들이었다. 수에즈 운하 건설에 성공한 레셉스가 민간회사를 설립하여 1881년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 수에즈 운하의 대성공에 취한 프랑스는 파나마를 자신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말라리아와 황열병 등 예상치 못했던 문제로 21,900명의 노동자가 죽었고 자금 고갈 등으로 1889년 파산하고 운하 건설은 중단되었다. 모기가 옮기는 질병을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9년 간의 공사는 몇만 명의 시체와 부정부패의 스캔들만 남기고 끝났다. 파산 전 모집한 복권부 사채를 입법화할 때 유대인 금융자본가를 통하여 정부의 각료들과 국회 의원들이 매수되었다는 사실이 1892년 신문에 폭로되었고, 여론이 악화되며 장관들과 정치인들이 물러났으며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운하는 물론이고, 프랑스 정치까지 흔들렸다.
미국의 결단: 의료 혁신이 성공의 열쇠였다
20세기 초 대서양과 태평양 두 대양을 연결하는 해양 채널의 중요성을 강조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 파나마 독립을 지원하고 파나마 운하 지역에 대한 조차권을 인정하는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다른 접근을 했다.
이때야 비로소 풍토병의 원인이 모기가 옮기는 말라리아임이 밝혀졌고, 의무 지원을 총괄한 육군 군의관 윌리엄 크로포드 고거스 소장의 활약이 컸다. 프랑스가 모기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미국은 그 원인을 파악했다. 과학이 야만성을 이겨냈다.
1904년 5월에 시작한 운하 건설은 총 건설비 3억7천5백만불에 5만6천명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으며, 공사 기간도 10년이나 걸렸다. 황열병과 말라리아 등으로 공사 도중 2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마침내 1914년 8월 15일에 첫 통과를 하며 파나마 운하는 공식적으로 개통했다.
세계 무역의 지도를 다시 그은 인프라
무엇이 달라졌나?
파나마 운하 개통은 세계 무역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선박들은 더 이상 남미 대륙을 돌아가는 위험하고 시간 소모적인 항해를 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로 인해 해상 운송 비용이 크게 절감되고 세계 무역량이 급증했다. 파나마 운하의 개통 이전에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항해하기 위해 남아메리카 대륙을 남쪽으로 크게 돌아 춥고 거칠기로 유명한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렸는데, 파나마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화물선의 운항시간 단축과 안전성에 큰 획을 그었다.
오늘날 매년 약 1만 9000척의 선박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며, 이는 전 세계 해상 무역량의 약 5%를 차지한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파나마 운하의 역사는 인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어떻게 이루어내는지 보여준다.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니었다. 프랑스는 부와 기술을 가졌지만 패배했다. 미국이 성공한 까닭은 실패의 이유를 파악하고 개선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진보의 대가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 대부분이 카리브해 도서 지역에서 온 저임금 노동자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번영한 해상 무역 뒤에는 이름 없는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세계사는 개선과 발전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그 진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며 이루어지는지 기억해야 한다. 파나마 운하처럼 말이다.
글쓴이: 이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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